,연시몽인, 가명으로 윤인원, 왕조숭, 유맹원, 박철, 왕국금 등을 쓰기도 함. 구한말로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친 민족수난과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광복운동 시기의 인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가로서 가능한 방도를 모두 시도해 본 가장 전형적인 항일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한미한 농촌선비
1887년 충북 청원군 귀래리로 이사 이후 서당훈장을 하던 조부아래 수학하고 성장함
1898년 성균관 입교,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 한편으로 유학을 공부하고 한편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입수된 신서 개화사상을 공부, 개화자강론자로 변모
1901년 <문동학교>에서 교육계몽운동 전개
역사상 상호부조는 가장 지배적인 요인이었으나, 근대국가와 정부의 강권주의 체계가 성립하면서부터 그 역할이 위축 또는 약화되었던 반면 지배와 억압을 야기하는 경쟁 혹은 투쟁이 보다 확산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경쟁과 상호부조의 논리는 신채호에게 있어서는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
민족주의 사학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역사관은 한국사 인식체계와 역사 무대의 확대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는 단군을 강조하고 前後 三韓設을 주장하였고, 부여․고구려 중심의 한국사 체계를 주장하였으며, 淮河 유역과 산동반도 및 중국 동북 지방의 고대 東夷族의 활동 지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을 깊이 관찰하고 유학적 이론과 사고에 대하여 깊은 성찰과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는 또 당시에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급진개화사상이나 위정척사사상의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개화 사상을 자주적인 입장에서 민족자강사상으로 수용 발전시키고자 부심하였다.